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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오늘도 보이스피싱에 속고 있는 당신에게"
    “경찰입니다. 지금 속고계십니다. 지금 통화하고 있는 그 전화, 사기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보이스피싱 의심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하면 이미 피해자는 전화기 너머 누군가와 연결된 채이다. 제복을 입고 신분증을 보여도 소용없다.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분은 검사래요.” “금융기관에서 직접 온 전화예요” 경찰청과 금융당국 통계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피해는 매년 수만 건에 이르고, 2025년 1월–10월간 누적 피해는 경찰청 기준 약 1조 566억원으로,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하였다. 더 무서운 사실은 피해건수보다 1인당 피해 금액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후자금, 전 재산, 심지어 대출까지 내어 보이스피싱범에게 보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현장에서 느끼는 현실은 더 참혹하다. 피해를 막기위해 달려왔지만, 피해자는 이미 우리보다 전화기 너머의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 오늘날의 보이스피싱은 더 이상 단순한 전화사기가 아니다. 사람의 심리를 정교하게 계산한 조직범죄이다. 공포를 만들고, 상대를 고립시키고,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특히, 최근 가장 위험한 수법은 어플리케이션 설치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보안 어플입니다.” “금융보호 프로그램입니다.” “수사 협조용 어플입니다” 이 말들에 속아 어플을 설치하는 순간, 당신의 휴대전화는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다. 검색기록, 문자, 통화내역, 계좌까지 모두 감시당할 수 있고, 어디로 전화를 걸어도 보이스피싱범은 이 전화를 가로챌 수 있다. 피해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말한다. “제가 직접 경찰에 전화해서 확인했어요” “은행이 전화를 안받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의 전화기가 범죄자의 손에 장악된 것이다. 오늘도 출동 경찰관은 이야기한다. “이건 보이스피싱입니다. 지금 당장 전화를 끊으셔야 합니다. 어플을 삭제하셔야 합니다. 돈을 보내면 안됩니다” 가장 큰 비극은 피해자들은 이미 보이스피싱범을 신뢰할 수 밖에 없게 설계된 상황 속에서 경찰관을 만난다는 점이다. 그럼 이 잘짜여진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공공기관, 금융기관은 절대 전화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비밀을 요구하지 않는다. 계좌이체를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라는 말로 당신을 협박하지 않는다. 의심은 무례가 아니다. 전화를 끊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오늘 그 한 번의 끊음이 당신의 내일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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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2
  • [풍수연재] 일제의 풍수 침략(2)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1931)』가 발간된 이후, 일제는 조선의 풍수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식민지 정책에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조선 신사였다. 그래서 1930년대 이후 설치된 조선 신사는 입지선정에 풍수가 적극 활용되는 면모를 보인다. 결과적으로 1930년 즈음은 일제가 자행한 공간적 훼손에 ‘훼손 의도의 유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 이전 시기는 식민지 통치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훼손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이후는 풍수적 ‘훼손 의도’를 가지고 자행한 ‘풍수 침략’으로 볼 수 있다. 이때 ‘훼손 의도’가 중요한 것이, 만약 공간적 훼손이 훼손 의도가 있다면 민족말살정책을 위한 풍수 침략으로 볼 수 있지만, 훼손 의도가 없다면 오늘날의 각종 개발에 따른 국토 훼손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사보고서 한 권이 단맥을 포함한 일제의 공간적 훼손 양상을 파악하는 기준이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명확한 공식 문서나 기록이 없는 현 상황에서 나름 차선책이 될 수는 있다. 굳이 포장하자면, 『조선의 풍수』는 단순한 개인 저작물 수준을 넘어서며, 조선총독부의 구관조사에 의해 발간된 공식 보고서였다. 이를 통해, 일제의 조선의 풍수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전국의 풍수 단맥 사례들은 비일비재하다. 철도(도로)가 마을이나 주택, 역사적 인물의 묘소를 가로지르거나 바짝 붙어 설치된 곳이 있다. 철도(도로)가 마을의 풍수 형국(形局)을 훼손한 곳도 있다. 또 풍수적 중요지점에 쇠말뚝이 박혀 있는 곳도 있으며, 인물이 나올만한 지세를 가진 마을의 산줄기를 끊었다고 전해지는 곳도 있다. 그 사례들을 전부 일제의 풍수 침략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오늘날의 국토 개발과정의 훼손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1931)』 발간 시기가 전국에 산재한 단맥 사례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풍수 단맥, 경주의 사례 경북 경주의 대표적인 단맥 사례로 ‘양동마을’과 ‘선덕여왕릉’이 있다. 먼저 양동마을 사례를 보자. 경주와 포항을 연결하는 경동선 철로가 양동리 일대에서 크게 ‘U’자형으로 휘어져 유금리로 이어진다. 그런데 일제의 최초 계획은 철로가 양동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에서 안산인 성주봉을 연결하는 산줄기(龍脈)가 끊기게 된다. 이에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해 철로를 우회시켰다고 한다. 이때가 1910년대다. 아직 일제가 조선의 풍수를 식민지 통치사업에 활용할 가치를 못 느끼고 있을 시기였다. 결론적으로 양동마을을 통과하기로 된 철로계획은 특별한 ‘풍수적 단맥 의도’가 있었다기보다 지형 및 공사비용 절감을 고려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그들의 철로 부설의 목적에 양동마을의 풍수적 훼손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주민들의 철로우회 요구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 임이 자명하다. 두 번째 사례는 선덕여왕릉이다. 이곳은 경주와 울산을 잇는 동해남부선이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를 갈라놓고 있다. 동해남부선 개통은 1936년도다. 시기적으로 일제의 ‘훼손 의도’가 포함될 수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자 경주인들이 신성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형을 보면 일제의 훼손 의도가 한층 더 명확해진다. 1930년대 이전에는 지금의 국도(노란 실선) 인근으로 협궤철도가 놓여 있었다. 이후 동해남부선을 가설하면서 굳이 협궤철도 인근의 평지를 놔두고 공사가 어려운 지금의 산능선 길을 택했던 것이다. △전국의 단맥설, 주요 등장인물은 이여송과 일제 이외에도 전국에는 단맥설(斷脈說)이 전하는 지역이 셀 수 없이 많다. 여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일본제국이다. 주요 내용은 큰 인물이 나올 만한 마을의 혈(산줄기)을 자르자 피가 쏟아져 흘렀다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경우 정확한 단맥 장소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기록 없이 구전(口傳)으로만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실 이러한 단맥설은 거의가 전설로만 머물지 사실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민중들의 응어리 진 한(恨)이 풍수의 ‘용맥설(龍脈說)’과 결합해 ‘산천(山川) 혈맥 끊기’라는 구비설화로 고착화된 것이다. 단맥설은 임진왜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여송은 그의 부(父)가 명나라로 귀화한 조선인 출신의 명나라 장수였다. 그는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왔지만 전투에는 소극적이면서도 조선에는 온갖 횡포를 자행함으로써, 많은 조선인들로부터 원성을 받았다. 그에 대한 민중들의 부정적인 생각은 구비설화라는 민족적 응징으로 표출되고 세대를 거쳐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풍수의 ‘산줄기(龍脈)의 강조’ 개념과 합쳐지게 된다. 그래서 완성된 스토리가 ‘이여송이 조선의 산천이 마음에 들어 차지할 욕심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자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일제에 대한 저주와 울분이 등장인물만 바뀌어 재생산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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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1
  • [불교경전] 반야심경의 핵심 사상은 공(空)이다
    1.불교의 공사상 불가의 ‘공(空)’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즉, 유와 무로부터 초월된 관념이다. 유라는 것[유상-有相]과 무라는 것[무상-無相]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공상(空相) 이라한다. 도가의 무(無)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공(空)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 하는 실체는 없으며, 오직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즉 인연만 있으므로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이며, 이를 공(空) 이라고 한다. 공(空)은 '실유(實有)'가 아니라,'환유(幻有)'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뜻에서 시작하여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2.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부분은 2강에서 설명하였지만 이 경전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이어서 한번 더 설명하고자 한다. 반야심경의 한역본으로는 현장의 것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데, 그의 번역에 의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산스크리트본을 그대로 직역하면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현상일 수 있다.”가 된다. 이것을 현장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번역하면서 팔만대장경의 대표적인 문구가 된 것이다. 현장은 갔지만 그가 번역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1400년이 지나도록 모든 불교인의 입을 통해서 독송되고 있다. 번역자의 번역에 따라 영원불멸의 명 번역이 된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래서 현장의 반야심경이 가장 잘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실체란 있을 수 없고, 또 변화하기 때문에 현상으로 나타나며, 중생은 그것을 존재로써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오온(五蘊)· 십이연기(十二緣起), 지(智)와 득(得), 일체의 관념과 객관적 존재를 본질적인 관점에서 공(空)이라고 갈파한 이 경전의 입장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부정적인 허무(虛無)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과 객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잘못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다. 3. 공은 개개인의 참된 마음. 이 경전에서 갈파한 반야바라밀다나, 공은 개개인의 참된 마음이다. 걸림 없는 마음, 공포가 없는 마음, 교만하지 않는 마음, 영원히 맑고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마음이며 부정을 겪어 그것을 넘어선 대 긍정의 마음이다. 여기서 화합과 평화와 자유와 대 해탈을 얻을 수 있음을 이 경전을 통하여 자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4. 제법공상(諸法空相)→ 집착할 대상이란 본래 없는 것 만물은 독립된 스스로의 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상(假象)에 불과하다. 오직 수많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공상(空相)이다. 이를 ‘제법공상(諸法空相)’이라 한다.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집착[견해, 상(相), 산냐]하는 어느 것도 공(空)이므로 집착할 대상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집착’을 하지 않으면 ‘탐진치’가 없어지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며, 마침내 ‘득도’(得道: 열반, 청정무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주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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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1
  • [풍수연재] 일제의 풍수 침략(1)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문화·역사·언어의 훼손과 왜곡을 강요했다. 식민지 정책이 우리 땅에서 자행되었기에 한반도의 ‘공간’ 또한 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조선신사 설치, 철도나 쇠말뚝에 의한 단맥(斷脈), 조선궁궐의 훼손 등이 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생각들이 같지 않다. 우리 풍수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은 그것들을 풍수적 침략행위로 본다.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풍수적 ‘훼손 의도’를 가지고 자행한 ‘풍수 침략’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증명할 공식 문서나 자료가 거의 없다. 그래서 반발도 많다. 반대자들은 일제에 의한 공간적 훼손들이 식민지 통치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한 부가적 훼손으로 본다. 급기야 앞의 주장에 대해 단순한 ‘민족 감성팔이용’ 정도로 취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전국에 산재한 일제의 공간 훼손 사례들을 단순한 감성팔이용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 깊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고민 끝에 찾은 것이 ‘구관조사(舊慣調査)’였다. 그런데 각종 조사항목에 ‘풍수’ 부문은 아예 없었다. 그나마 민간생활과 관련된 습관, 신앙, 전승문화 등이 ‘민속(民俗)’ 항목으로 포함되었지만, 이것마저도 다른 조사 항목들의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 풍수학계가 생각해 온 것과 반대다. 우리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줄곧 조선의 풍수에 관심을 갖고 식민지 통치에 적극 활용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조선의 풍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무관심을 바꾸는 계기가 생겼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등장이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촉탁을 받아 당시 구전되어오던 조선의 풍수를 종합 정리해 『조선의 풍수(1931)』를 발간한다. 물론 그는 『조선의 풍수』 외에도 ‘조선의 민간신앙 4부작’으로 불리는 『조선의 귀신(1929)』, 『조선의 무격(1932)』, 『조선의 점복과 예언(1933)』을 연이어 출간했다.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가 발간된 이후, 드디어 일제는 조선의 풍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식민지 정책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신사(神社)정책’이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은 ‘1면 1신사주의’를 표방한다. 전국의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신사를 세우고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른다. 신사를 식민지 지배를 위한 상징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때 풍수가 적극 활용된다. 특히 신사의 입지선정에 풍수가 활용되었다. 신사를 평지가 아닌 산 중턱이나 구릉지에 설치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기존의 조선 읍치의 풍수 양상과 충돌할 것은 뻔하다. 오히려 충돌을 노린 것이다.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읍치 후방의 주산(主山) 중턱이었다. 읍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타고 있음으로써, 지맥을 끊거나(단맥) 주산의 정기를 가로챌 수 있기 때문이다. 여의치 않을 경우 청룡·백호 능선이라도 올라탔다. 대표적으로 경북 청송의 청송 신사가 있었다. 청송 신사는 고을 주산인 방광산 지맥(地脈)이 정통으로 내려오는 남사면에 입지해 있어, 주산에서 고을로 이어지는 정기를 끊고 있는 위치였다. 조선 신사의 그러한 위치는 풍수적 목적 외에도 심리 효과도 발휘했다. 평소 ‘낮은’ 곳에서 살았던 조선인은 구릉지 위 ‘높은’ 곳에 있는 신사로부터 무의식적인 신성, 권위, 감시 등의 감정을 강요받았다. 일제가 가장 공들인 신사는 조선신궁이었다. 조선신궁은 전국의 모든 신사의 대표격이자 식민지 지배 전략의 상징물이어야 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중심부인 서울(경성)이 선택되었고, 그중에서도 남산의 한양공원이 낙점되었다. 한양공원은 구릉지를 타고 있어 시가지 전체를 조망하고 위압할 수 있는 위치였다. 풍수적으로는 경복궁의 안산(案山)인 남산을 타고 있어서, 경복궁 전면에 배치된 조선총독부와 함께 전시적 파급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자리였다. 경북 경주 읍내에도 신사 두 곳이 있었다. 1930년대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신사는 경주교회(동부동) 뒷마당 부지에 있었다. 당시 이곳은 시가지 중심부로서, 경주 거류 일본인들의 경제성·접근성이 고려된 위치였다. 또 한 곳은 1930년대 이후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성공원 신사다. 이곳은 경주민들에 대한 황성공원의 상징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된 입지였다. 경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임에도 북서쪽이 유난히 텅 비어 있다. 그래서 신라시대 때부터 동쪽의 소금강산에서부터 서쪽의 서천(西川)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풍수 관념이 퇴색된 오늘날에도 ‘공원구역’으로 난개발이 제한된다. 황성공원은 산줄기 체계로 보면 경주 도심부의 상징적 주산이다. 또 물줄기 체계로 보면 남천과 서천이 만나 빠져나가는 수구(水口)가 된다. 그만큼 풍수적으로 중요한 자리란 뜻이다. 일제가 동부동에서 황성공원으로 신사를 옮길 때는 다분히 의도가 있었다. 경주인이 풍수적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곳에 입지시킨 것이다. 황성공원 신사는 입지선정에 풍수가 활용된 일제의 풍수 침략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글) 박성대 박사 현)대구카톨릭대학교 교수 현)영남실학풍수연구소 소장 현)한반도풍수 유튜브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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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8
  • [불교경전] 공(空)이란 무엇인가?
    1. 불가의 ‘공(空)’사상과 도가의 ‘무(無)’ 불가의 ‘공(空)’사상은 도가의 ‘무(無)’사상 보다 한 차원 높은 개념이다. 무는 부존재를 의미한다. 불가의 ‘공(空)’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즉, 유와 무로부터 초월된 관념이다. 유라는 것[유상-有相]과 무라는 것[무상-無相]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공상(空相) 이라한다. 공(空)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 하는 실체는 없으며, 오직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즉 인연만 있으므로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이며, 이를 공(空) 이라고 한다. 공(空)은 '실유(實有)'가 아니라,'환유(幻有)'이다. 2. 반야심경의 궁극적 목표는 ‘바라밀다’이다. 바라밀다는 범어인데 번역하면 ‘도피안’ 저 언덕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우리가 있는 이 언덕을 고통과 윤회의 세계, 탐욕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수행을 잘하여 극복하면 저 언덕, 즉 진리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데 반야의 지혜란 공의 체험으로 얻는 것이고, 공의 체험은 참다운 수행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람의 영적인 단계나 지위에 따라 3가지가 있습니다. 3. 공의 종류 ? 1) 인식내용으로서의 공-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대상을 보고 평가함에 있어 제7말라야식이라는 아집에 의해서 자기 입장에 서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음으로 인해 좋다, 싫다, 괴롭다, 즐겁다 하는 것이 생겨난다. 이것은 인식내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고(변계소집성) 실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인 것입니다. 2) 존재로서의 공- 모든 삼라만상이 영원히 하나의 실체로 머물러 있는가를 관찰해보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인연에 의해서 내가 전생에 썼던 만큼 펼쳐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의타기성) 즉,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가유-假有)들이니 결국은 ‘공(空)‘이라는 것이다. 3) 진리 차원의 공- 앞의 인식차원이나 존재차원의 공은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본성 차원의 공은 내가 인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바로 그것이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차원이다. 즉 주관과 객관을 모두 벗어난 마음자리이기에 자기 스스로 깨쳐야 알 수 있는 부처나 보살의 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자리이다.(원성실성) 우리의 육신은 지수화풍 4대가 인연의 힘에 의해 남자 또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6근이 안으로 눈이 멀어 4대의 모습이 자기 모습의 실체로 알고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선업도 짓고 악업도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적을 평생 자기 아들로 삼는 마음인데 원성실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본성을 미하여 일으키는 순간의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 이 언덕이고, 나고 죽음이 없는 본성을 깨달으면 저 언덕인 것이다. 경계를 만나도 항상 속지 말아야 한다. 중생들은 어떤 경계를 만나게 되면 판단하게 되는데, 이때 판단을 하지 않고 관찰을 해야 한다. 관찰과 판단의 차이는 관찰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제 3자 입장에서 경계를 보는 것인데. 판단은 내 입장에서 상대를 보는 것이다. 위파사나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있다. 경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여 알아차림 함으로써 그 분별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다. 경계가 일어나면 말라야식 즉 아집, 아견, 아치, 아만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볼 때는 판단이 나오고, 한 생각을 쉰 상태에서 상대를 살펴보면 관찰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도 닦는 요령인 것이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쓰라‘하는 것도 이와 같은 뜻이 된다. 본성의 자리는 대상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한 생각 쉼으로써 체험되어 지는 것이다. 독자들이여 이 우주의 무한한 만큼이나 부처님 법 또한 무한함이다. 인생에서 진정 불법의 의미를 느껴보고 깨달아 저 바라밀로 가보지 않으시렵니까? (월간 관세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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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8
  • [풍수연재] 양산 삼장수 생가지
    경남 양산시 하북에는 이징석(李澄石), 이징옥(李澄玉), 이징규(李澄珪) 등 조선시대 삼형제 장수(장군)가 태어난 생가가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삼수리(三帥里)다. 최초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부친인 이전생(李全生)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순무어사였던 그는 왕명을 받고 전국을 순찰하던 중 양산 땅에서 명당을 발견한다. 풍수에 일가견 있었던 그는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땅임을 직감했다. 이윽고 몇 년 후 이곳에 정착하여 삼형제를 낳게 된다. 태몽도 예사롭지 않았다. 첫째인 징석은 영취산이 몸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으며, 둘째 징옥은 천성산이, 셋째 징규는 금정산이 각각 들어오는 꿈을 꿨다. 세 형제는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였고, 범상치 않은 숱한 무용담을 만들어냈다. 급기야 삼형제 모두 10대에 무과 급제, 변방의 오랑캐 소탕 등 당대 최고의 장수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마을에 들어서면 사방이 산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도 명당임을 직감할 수 있는 지세다. 터를 잡은 이전생도 이 모습에 끌려 정착할 결심을 한 듯하다. 특이한 점은 마을의 산세가 장수 배출 터라기에는 너무 부드럽다. 통상 무(武)와 관련한 인물 배출 터 주변에는 그에 걸맞게 크고 우뚝한 산봉우리가 있다. 때론 바위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마을은 오히려 부자 터에 가깝다. 산으로 잘 둘러싸여 있고, 산세 또한 툭 불거진 봉우리가 없이 유순하다. 명당은 크게 넓지 않지만 한평생 먹거리 걱정 없는 정도는 된다. 그렇다면 어떤 특징이 이곳을 장수 배출 터로 만들었을까? 그 비밀은 마을의 주산(主山)에서 생가지까지 내려오는 산세에 있다. 생가지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출발점은 영취산이다. 영취산은 낙동정맥을 타고 있고 기세와 영험함으로 익히 알려진 산이다. 영취산 기운을 품은 산줄기가 머물 곳을 찾아 내려오다가 마을의 주산을 일으키며 잠시 숨을 고른다. 힘을 추스르고 다시 주산을 출발한 산줄기가 생가에 다다를 즈음 몇 개의 옹골찬 봉우리를 연속해서 솟구친다. 한편 땅 기운은 바람에 취약하다. 바람에 노출되면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氣乘風則散). 그래서 아무리 좋은 땅 기운도 산이 사방으로 감싸줘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 이곳은 주위 산줄기들이 생가지를 완벽히 감싸주고 있다. 바람맞을 염려가 없다. 생가 바로 붙어서는 청룡과 백호가 생가지를 잘 감싸준다. 다시 외청룡이 그 바깥을 감싸주고 있다. 생가지 앞으로는 외백호가 마을을 크게 감싸주면서 뻗어 내리고 있다. 이러한 여러 겹의 산줄기들의 보호 속에서 영취산 땅 기운은 제 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다. 현재 생가지에는 후손이 살고 있다. 그런데 동향(東向)인 현재의 건물이 삼장수가 태어난 정확한 자리는 아닌 듯하다. 건물 뒤로 작은 골짜기가 있다. 골짜기가 작지만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 물과 바람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풍수의 혈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맞는 자리에는 맺히지 않는다. 풍수의 눈에는 건물 왼쪽에 밭으로 일군 남향의 터가 삼장수가 태어난 정확한 자리로 보인다. 이곳이 생가지 내에서도 풍수적 혈 자리이기 때문이다. 풍수의 표현을 빌리면, 혈 뒤에서 미세한 봉우리(입수·入首)가 유정하게 좌우 팔(선익·蟬翼)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그 형태가 장수 배출 터에 걸맞게 모양 좋은 암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삼장수가 태어날 때의 태몽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풍수는 산봉우리 중에서도 터의 앞과 뒤에 있는 산봉우리에 가중치를 높게 부여한다. 뒤의 봉우리는 터와 산줄기로 연결되어 있어 땅 기운을 직접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앞의 봉우리는 터에서 가장 잘 보이기 때문에 그만큼 터에 많은 기운을 불어넣는다고 여겨진다. 첫째 징석의 태몽은 영취산이다. 영취산은 터 뒤의 봉우리로 생가지에 직접 땅 기운을 불어넣는 가장 중요한 봉우리다. 둘째 징옥과 셋째 징규의 태몽은 천성선과 금정산이다. 천성산과 금정산은 생가지의 남쪽에 있다. 실제로 남향의 밭에서 보면 천성산과 금정산이 멀리 눈에 잡힌다. 근래 들어 삼장수 마을 관광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생가지를 정비하고 체험관과 테마공원 등을 조성한다고 한다. 이때 생가지 복원을 위해 고증이 이루어지겠지만, 삼장수가 실제로 태어난 자리를 찾는 데는 풍수가 참조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남향의 밭 터에 복원된 생가가 들어서야 한다. 만약 체험관 등 부속건물이 이 자리에 놓인다면 풍수의 눈으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복원이 되고 만다. 필요하다면 복원된 생가를 전시용으로만 두지 말고, 체험형 ‘인물 배출 명당’ 숙박 시설로 활용해도 좋다. 단 이를 위해서는 생가지 뒤 풍수 혈 자리 증거(입수·선익)의 존재가치를 이해하고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글) 박성대 박사 현)대구카톨릭대학교 교수 현)영남실학풍수연구소 소장 현)한반도풍수 유튜브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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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3
  • [불교경전] 반야심경의 설법장소
    우리들이 독송하는 현장법사나 구마라집 법사가 번역한 반야심경의 약본에는 부처님과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을 설법한 장소가 어느 곳인지를 알수 없지만 5개의 광본중의 일치된 기록을 통해서 설법 장소를 알 수 있다. 광본1. 보편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 (당나라 법월 번역) 여시아문, 일시, 불재왕사대성영축산중, 여대비구중만백천인구, 보살마하살칠만칠천인구, 기명왈, 관세음보살, 문수사리보살, 미륵보살등, 이위상수..... 광본2. 반야바라밀다심경 (당나라 반야와 이언등 번역) 여시아문 일시불재왕사성기사굴산중, 여대비구중급보살중구...... 광본3. 반야바라밀다심경 (당나라 지혜륜 번역) 여시아문 일시부아범 재왕사성영축산중 여대필추중급대보살중구..... (빅쿠(Bhiksu)의 음역은 ‘비구’, 광본3은 의역하여 ‘필추’라 하였다.) 영축산(靈鷲山)과 기사굴산(耆??山) 광본에서는 반야심경의 설법장소가 왕사성의 영축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늘 설법을 펼치던 곳이다. 영축산은 고대 인도에 있던 마가다국(magadha國)의 도읍지인 왕사성(王舍城)에서 동북쪽 약 3㎞ 지점에 있는 산으로 팔리어 gijja-k??a를 음역하여 기사굴산(Grdharkuta)으로 번역한 경전(광본2)도 있다. 산의 형상이 마치 독수리 같고 또한 산 정상에는 많은 독수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 인도 고대의 현군인 빈바사라왕이 세웠다. 그는 가장 먼저 불교에 귀의한 국왕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법하신 장소가 또한 이곳이다. 반야심경 주문의 출처 반야심경의 주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주문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 출처를 알아보겠습니다. ▶다라니집경(多羅尼集經) 중천축(갠지즈강 방면)의 고승인 ‘아지구다’는 652년 많은 범문 경전을 지니고 장안에 왔다. 당나라 고종은 그를 대단히 중시하여 특별히 대자은사(大慈恩寺)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아지구다가 주도한 비밀경전의 번역은 당시의 현장법사의 역경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번역한 경전 가운데 하나인 <다라니집경>의 내용은 일체의 불보살과 제천에 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경전의 제3권 <반야대심다라니> 열여섯 번째 주문은 다음과 같다. ▶다질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하 → 여기서 다질타(tadyatha)는 범어를 음역한 것으로써 의역하면 ‘즉설주왈’이다. 이 구절의 주문(呪文)은 반야심경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와 대단히 유사하다. 반야심경의 주문이 이것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주문은 밀교(密敎)의 진언(眞言)일 뿐만 아니라 반야바라밀보살의 주문이다. 밀교 태장계의 지명원에는 모두 다섯 명의 보살이 있다. 사방에는 부동명왕, 항삼세명왕, 대위덕명왕, 승삼세명왕이 있고 중앙에는 반야바라밀보살이 있다. ▶밀교 태장계의 반야보살 이 반야바라밀보살의 모습은 천녀(天女)의 상이며 모두 여섯 개의 팔이 있다. 왼손의 하나로는 범협(범문 패엽경을 보관하는 상자)을 들고 있는데, 그 속에는 반야보살의 진언이 들어 있다. 그녀의 밀호(密號)는 지혜금강(智慧金剛)이다. 대일여래와 함께 사바라밀 가운데 금강바라밀을 이루고 있으며, 대일여래의 정법륜의 화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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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5-12-23
  • [기고] APEC 성과, 제대로 이어가려면
    지난달 말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지방도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인 무대였습니다. 21개 회원국 정상과 2만여 명의 인사들이 경주를 찾았고 '한국의 멋과 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행사 기간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모든 일정이 완벽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 한 분 한 분의 성숙한 협조와 참여 덕분이었습니다. 이번 APEC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시민 여러분이었습니다. APEC 유치와 준비 그리고 성공적인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이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낸 변화의 역사였습니다. 2021년 유치 선언 직후 146만 명이 넘는 국민이 서명에 참여했고 APEC 클린데이 운영, K-미소운동 전개, 아름다운 경관 가꾸기에 함께 참여하며 도시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시민과 행정이 함께 힘을 모은 결과 경주는 중앙·지방·시민이 조화를 이룬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 주도형 국제회의 도시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이번 APEC을 통해 경주는 세 가지 소중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도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인프라 혁신입니다. 도로, 하천, 경관, 숙박, 통신망 등 도시 기반이 대대적으로 개선됐고 보문단지와 HICO 일대는 세계적인 국제회의도시로 손색없는 경쟁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둘째는 문화외교의 새로운 지평입니다. 경주 특산빵, 천년한우, 신라금관, 한복, 한식 등 지역의 문화콘텐츠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한류의 원형도시' 경주로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 특히 만장일치로 채택된 '경주선언'에서 '문화창조산업'을 APEC 공식 의제로 명문화한 것은 문화도시 경주라서 가능했던 외교적 성과라 생각합니다. 셋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긍심입니다. 인구 25만의 작은 도시 경주가 이렇게 큰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시민들이 보여준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은 경주가 글로벌도시로 도약하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같은 APEC 성과를 어떻게 이어가느냐입니다. APEC의 소중한 경험과 자산을 미래발전 동력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경주시는 '포스트 APEC 본부'를 신설하고 앞으로 우리가 힘모아 추진해야 할 과제들을 구체화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문화 분야에서는 '경주세계역사문화포럼' 창설과 'APEC 문화의 전당' 건립을 통해 문화와 창의, MICE 산업이 융합된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APEC 퓨처스퀘어', '글로벌 CEO 서밋', '경북 AI 이니셔티브'를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디지털 경제도시로 도약하고자 합니다. 평화 분야에서는 삼국통일을 이룬 성지로서 '신라통일평화공원'과 '한반도통일미래센터'를 조성해 APEC의 레거시를 한반도 평화통일의 동력으로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이 모든 노력의 중심에는 무엇보다 시민 여러분이 있습니다. APEC이 끝났다고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됩니다. APEC의 성공에 힘입어 요즘 경주는 관광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를 돈벌이 기회로만 알고 바가지요금, 눈속임같은 짓을 행한다면 관광객은 경주를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APEC이 끝난 지금도 시민 여러분의 환대와 미소, 질서와 청결로 증명된 성숙한 시민의식은 여전히 경주의 힘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여 주신 경주의 힘이 있기에 이 도시는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문화와 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진정한 글로벌 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APEC의 성과를 제대로 이어가는 길은 K-미소의 그 정신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가 화랑정신으로 천년의 역사를 넘어 세계로 나아갔던 것처럼, 이제 경주는 APEC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세계의 중심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5-11-26
  • [기고] 경주소방서, 겨울철 화재 인명피해 줄이기 위한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 강조
    경주소방서가 본격적인 겨울철을 맞아 주택 화재로 인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의 중요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기온 하강으로 실내 난방기구 사용이 급증하면서 주택 내 화재 발생 위험이 높아지는 만큼 시민들의 적극적인 대비를 촉구하고 있다. 소방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겨울철(12월~2월)은 다른 계절에 비해 화재로 인한 사망자와 인명피해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주택 화재는 대피 공간이 제한적이고, 취침 시간대에 발생할 경우 인명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송인수 서장은 "주택 화재는 초기 대응이 골든타임이며, 단돈 몇만 원으로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주택용 소방시설을 갖추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행법상 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주택은 소화기와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고 소화기는 화재 초기에 사용해 불을 끄거나 연소 확대를 지연시키는 '소방차 1대 이상의 효과'를 내며 단독경보형 감지기는 화재 발생 시 연기를 감지해 큰 경보음을 울려 신속하게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경주소방서는 시민들이 안전한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난방기구 사용 전 안전 점검, 문어발식 콘센트 사용 금지 등 기본적인 화재 예방 수칙 준수를 당부했다. 또한 화재 발생 시 무리한 진화 시도 대신 '불나면 대피 먼저' 원칙에 따라 신속하게 대피해야 한다. 또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겨울철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투자에 시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다.
    • 오피니언
    • 기고
    2025-11-26
  • [기고] APEC 성과, 제대로 이어가려면
    지난달 말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지방도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인 무대였습니다. 21개 회원국 정상과 2만여 명의 인사들이 경주를 찾았고 '한국의 멋과 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행사 기간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모든 일정이 완벽하게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 한 분 한 분의 성숙한 협조와 참여 덕분이었습니다. 이번 APEC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시민 여러분이었습니다. APEC 유치와 준비 그리고 성공적인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이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 낸 변화의 역사였습니다. 2021년 유치 선언 직후 146만 명이 넘는 국민이 서명에 참여했고 APEC 클린데이 운영, K-미소운동 전개, 아름다운 경관 가꾸기에 함께 참여하며 도시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시민과 행정이 함께 힘을 모은 결과 경주는 중앙·지방·시민이 조화를 이룬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 주도형 국제회의 도시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이번 APEC을 통해 경주는 세 가지 소중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첫째는 도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인프라 혁신입니다. 도로, 하천, 경관, 숙박, 통신망 등 도시 기반이 대대적으로 개선됐고 보문단지와 HICO 일대는 세계적인 국제회의도시로 손색없는 경쟁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둘째는 문화외교의 새로운 지평입니다. 경주 특산빵, 천년한우, 신라금관, 한복, 한식 등 지역의 문화콘텐츠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한류의 원형도시' 경주로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습니다. 특히 만장일치로 채택된 '경주선언'에서 '문화창조산업'을 APEC 공식 의제로 명문화한 것은 문화도시 경주라서 가능했던 외교적 성과라 생각합니다. 셋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긍심입니다. 인구 25만의 작은 도시 경주가 이렇게 큰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시민들이 보여준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은 경주가 글로벌도시로 도약하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같은 APEC 성과를 어떻게 이어가느냐입니다. APEC의 소중한 경험과 자산을 미래발전 동력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경주시는 '포스트 APEC 본부'를 신설하고 앞으로 우리가 힘모아 추진해야 할 과제들을 구체화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문화 분야에서는 '경주세계역사문화포럼' 창설과 'APEC 문화의 전당' 건립을 통해 문화와 창의, MICE 산업이 융합된 아시아판 다보스포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APEC 퓨처스퀘어', '글로벌 CEO 서밋', '경북 AI 이니셔티브'를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디지털 경제도시로 도약하고자 합니다. 평화 분야에서는 삼국통일을 이룬 성지로서 '신라통일평화공원'과 '한반도통일미래센터'를 조성해 APEC의 레거시를 한반도 평화통일의 동력으로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이 모든 노력의 중심에는 무엇보다 시민 여러분이 있습니다. APEC이 끝났다고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됩니다. APEC의 성공에 힘입어 요즘 경주는 관광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를 돈벌이 기회로만 알고 바가지요금, 눈속임질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관광객은 경주를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APEC이 끝난 지금도 시민 여러분의 환대와 미소, 질서와 청결로 증명된 성숙한 시민의식은 여전히 경주의 힘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여 주신 경주의 힘이 있기에 이 도시는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문화와 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진정한 글로벌 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APEC의 성과를 제대로 이어가는 길은 K-미소의 그 정신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가 화랑정신으로 천년의 역사를 넘어 세계로 나아갔던 것처럼, 이제 경주는 APEC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세계의 중심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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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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