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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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상(진흥문화재연구원)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은 제주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의 고난을 극복하고 여인의 몸으로 시대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상인으로서 재능을 발휘하여 큰 부(富)를 이루었다. 


1795년 제주에 큰 흉년이 들어 나라에서 모두 구제하기 어려운 시기에 만덕은 자신의 재산으로 육지의 쌀을 사들여 관청으로 보내 백성을 구휼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제주의 여인들은 바다를 건너 육지에 오르지 못한다는 나라의 법이 있었음에도 정조 임금의 명령으로 관청의 도움을 받아 만덕은 꿈꾸었던 궁궐과 금강산 여행을 하였다.


만덕은 1796년 가을 서울에 도착한 후 궁궐에 들어가 문안을 드렸고 왕비와 궁으로부터 칭찬과 많은 상을 받았다. 서울에 머문지 반년만인 1797년 3월 금강산으로 들어가 여러 곳의 기이한 경치를 모두 구경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며칠을 머무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즈음 만덕의 이름이 크게 알려져 공경대부와 사대부들이 모두 한번 만덕의 얼굴 보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만덕이 서울에 머물면서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던 그해 홍도 최계옥(崔桂玉, 1778~1822)은 경주부윤 유한모(俞漢謨)의 추천으로 상의원(尙衣院)에 선발되었다. 


10세에 시(詩)와 서(書)에 통달하고 음율을 깨우쳤던 홍도는 상의원에 선발되었던 20세 그해부터 이미 독보적인 기예로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1797년은 홍도가 상의원에 선발된 해로 만덕과 동갑이었던 정조 임금의 장인 박준원(朴準源, 1739~1807)의 소실로 들어가기 전이다. 홍도에게는 상의원에서 기예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인생의 봄날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때 홍도가 김만덕에게 시를 지어 보낸 것을 보면, 분명 두 사람은 만났을 것이다. 홍도는 자신보다 39살이 많고 어린시절 기녀생활로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우뚝선 만덕을 흠모하였을 것이고 만덕은 독보적인 재능을 가진 손녀딸 같은 어린 홍도를 어여삐 여겼을 것이다. 

  

홍도가 만덕에게 보낸 시(詩)는 유재건(劉在建, 1793년 ~1880년)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남아 있다. 유재건은 채제공의 『번암집(樊巖集)』에서 「만덕전(萬德傳)」을 옮겨오면서 끝부분에 『범곡기문(凡谷記聞)』에 실려있던 홍도가 김만덕에게 준 시를 기록하여 두었다. 


안타깝게도 『범곡기문』은 작자 미상으로 현재 전해오지 않고 있지만 『이향견문록』에는 "만덕이 서울에 왔을 때 기생 홍도가 시를 주었다.(萬德入京時 妓紅桃有詩曰)"라 기록하고 있다.

         

           女醫行首耽羅妓  여의행수 탐라 기녀가

           萬里層溟不畏風  만리물결에 바람 두려워하지 않았네 

           又向金剛山裡去  또 금강산 깊은 곳 향해가니 

           香名留在敎坊中  향기로운 이름 교방에 남아 있으리

                                                                        『凡曲記聞』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은 경주 출신의 대표적인 예능인으로 잃어버린 그녀의 묘비에 새겨진 앵무시(鸚鵡詩) 1편만 알려져 왔었다. 앵무시는 자신보다 39살이 많은 박준원이 60세를 전후한 시기에 홍도가 소실로 들어가면서 사회적 활동을 못하게 된 자신의 울적한 심사를 앵무새에 비유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한 오언절구의 수준 높은 작품이다.


          綠衿紅裳鳥  푸른 옷깃에 붉은 치마입은 새는

          每向雲霄鳴  매양 하늘과 무지개를 향하여 울고있으니

          雕籠深鎖久  깊숙한 새장속에 갇혀 오래있음에

          那得不銷形  어찌 얼굴이 야위지 않으리오

                                                         「紅桃墓碑」


홍도 최계옥은 박준원이 1806년 68세로 중풍이 들었다가 이듬해 2월 7일 죽음을 맞이하자 3년 상을 마치고 1809년 32세로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홍도는 자유의 신분이 되었지만 마지막 삶의 13년을 경주교방에서 소리꾼·기생·악공 등 후진 양성에 온 열정을 다하고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예술인이다. 그러므로 고서와 개인 문집을 좀 더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흩어본다면 『이향견문록』에서와 같이 새로운 작품과 그녀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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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홍도 최계옥, 의로운 김만덕에게 시를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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